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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유형 문화재인 숙소 고와쿠비 온천 쇼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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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다가문 촌장 저택의 역사

수령 400년의 전나무와 더불어

예전부터 오야마다 가문은 현재 아키타, 가와베, 센보쿠, 유리의 1시 3군에 걸쳐 논밭을 소유하였고, 전쟁 전에는 약 450ha(135만평)를 가지고 있던 대지주였습니다.

그 역사는 게이초 7년(1602년)에 아키타번 초대번주인 사타케 요시노부가 히타치국 미토(이바라키현)에서 데와국 아키타에 발령을 받았을 당시 옛 번주를 연모하여 아키타에 왔다고 하였고 처음에는 니시기무라의 오야마다 부락(사이묘지 마을을 향촌으로 하는 寄郷 오야마다 마을)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지만 이후 개전(開田)과 수운을 고려해 고와쿠비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듯 수령 약 400년으로 추정되는 전나무 무리가 광활한 농원에 치솟아 있습니다(막번 시대에 무사나 마을 관리인의 거처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그 대지에 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여러 전나무가 집 옆에 서 있습니다.
여러 전나무가 집 옆에 서 있습니다.

고와쿠비 지역에서 중역을 맡고 있습니다.

오야마다 가문은 막번체제 전기(17세기 후반)부터 고와쿠비 마을의 행정 관리소장(‘나누시,’ ‘쇼야’라고도 함)과 다른 지역간 경계를 지키던 파수꾼으로 지역 행정의 중심에서 활약하였고, 번주와 중역이 지역을 순찰할 때 번주의 숙박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현재도 그러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주는 차벤또(차를 내리는 도구를 넣는 것)나 약 2,000점에 가까운 고문서가 보관 되어 있습니다. 1826년 5월에 당시 오야마다 가문의 당주인 오야마다 분고로가 기술한 ‘고토즈테노오보에’에는 ‘1672년 선조인 지에몬이 우에노다이의 야시마령과의 영토 분쟁 후에 에도막부에서 3년 정도 임기를 끝마치고 나서 막부의 재판에 승리하여 근로에 대한 예의 표시로 그림에 나올 수 있었다.’고, 300년 전에 영토 논쟁 해결을 위해 에도에서 일했고 그 공으로 파수꾼이 되었다고 써 있습니다.

또 그 때 소송 재판에 대해 고와쿠비 마을에서 보낸 답변에는 나누시인 간스케와 그의 보좌인 지에몬이라고 기명날인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에 제시한 ‘선조 지에몬’이라는 것은 고와쿠비 마을에 이주한 초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주 시기는 1650년대 초중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생활을 이야기 고문서가 많이 남아있다.
당시의 생활을 이야기 고문서가 많이 남아있다.

비옥한 땅을 발전시켜 양조장을 영업하고 지역의 발전에 힘쓰고 있습니다.

또 ‘1661년 ~ 1672년에서 오늘날까지 159년간 파수꾼역으로 일하였다.’고 쓰여 있으며 파수꾼역을 당시까지 159년간 계속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고, 번의 경계를 수호하는 일과 오야마다 일가와 깊은 관계가 질의되고 있습니다.

오야마다 일가는 1673년 9월 21 ~ 1681년 이래 고와쿠비 마을을 시작으로 하는 이 지역 일대의 개발을 위해 힘을 쏟았으며 고와쿠비 전원 등의 비옥한 땅을 여는 한편 오모노카와 유역을 상권으로 하는 양조장을 에도 후기부터 약 50년간 운영하였습니다.
양조장 시대의 간판이 보관되어있다.
양조장 시대의 간판이 보관되어있다.

유형문화제에 등록 되어있습니다.

오야마다 저택은 1914년 3월에 고와쿠비 대지진으로 무너진 후 3년이라는 세월에 거쳐 1917년에 준공한 건물입니다. 저택은 격지 총 면적 약2,000평이며 건축면적 약 200평입니다. 건물 높이는 약 15m로 내진설계를 하였습니다. 지붕은 이리모야식 건축인 치도리하후로 정면현관의 가라하후와 더불어 성곽을 떠오르게 하는 중후함이 보입니다.

1999 년에 등록 유형 문화재로 등록되어 헤세이 15 년에는 일본의 호텔 · 여관 100 선 특별상 수상 온천 유산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관내의 자료관에는 귀중한 역사 자료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1917 년 준공 당시의 사진.
1917 년 준공 당시의 사진.

장인의 기술이 살아 숨쉬는 일본저택의 지보

완공당시 12대 당주 오야마 지에몬은 건축 3년전에 큰 피해를 일으킨 고와쿠비 대지진에서의 교훈으로 건축에 있어서 내진성을 중시하고, 당시의 목수이며 장인이였던 이노우에 기요마츠를 1년간 교토에 파견시켜 내진기술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 결과 지붕 밑까지 이어진 굵은 기둥이나 대들보와 기둥을 엮은 나무의 지주를 넣는 등 정성들인 내진 구조를 도입 시켰습니다. 그리고 2층은 지구미라는 공법으로 건축돼있습니다. 이것은 미리 2층을 지면에서 구조화 하고 일단 해체하여 1층을 완공하고 나서 2층을 지어 시간을 들인 정교한 공법으로 건축의 오차를 해소하였습니다.

외관에서는 신사와 절의 건축을 떠오르게 하는 지도리하후와 팔작 지붕, 가라하후를 채용한 지붕이 특징입니다. 또한 희소한 목재를 소유지에서 조달하는 등, 곳곳 마다 건물주의 확고한 생각과 갈고 닦은 장인의 기술을 살리고 3년의 건축기간을 걸쳐서 완공한 쇼호엔은 현대에 도달하기 까지 그 호화로운 모습을 지키며 건물 자체가 어느새 가치 있고 고풍스럽게 됐습니다.
수목이 무성한 넓은 정원
거대한 전나무의 웅대한 모습과 은행나무, 삼나무, 단풍나무등이 역사있는 정원에 줄지어 서있어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수놓고 있습니다.
수목이 무성한 넓은 정원
현관문의 툇마루
현관문의 툇마루
16.3m의 장대한 아키타 천연 삼나무 한그루를 그대로 사용한 복도와 방 세개를 이어놓은 나게시(윗문 홈대 위에 수평으로 보낸 부재)등으로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팔작지붕 / 정문
팔작지붕 / 정문
지붕의 윗부분은 맞배집으로 하고 사방에 차양 지붕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지도리하후, 가라하후와 더불어 중후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팔작지붕 / 정문

계단실
계단실은 장인 고유의 기술로 만든 로쿠메이칸풍의 디자인입니다. 일본풍의 구조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환시켜 기둥이나 난간등 서양풍의 기법이 공들여졌습니다. 그리고 계단 천장은 접어올린천장으로 그 하부의 석조난간은 일본풍입니다. 게다가 선형 천장은 맞댄천장으로 훌륭한 대조를 뽐내고 있습니다.
계단실


오야마다 가문 자료관

오야마다 가문 자료관
쇼호엔에 있는 오야마다가 저택 자료관에는 에도시대부터 쇼와시대의 생활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약 2000점의 고문서
약 2000점의 고문서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가미시모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가미시모
하이센 (연회석에서 술잔을 권하기 전에 씻는 그릇)
하이센 (연회석에서 술잔을 권하기 전에 씻는 그릇)

아키타 영주 사타케공이 사용했던 차벤또(1810년경)
아키타 영주 사타케공이 사용했던 차벤또
(1810년경)

진바오리 (게이오 4년 무진의 역할로 착용한 것)
진바오리 (게이오 4년 무진의 역할로 착용한 것)
마루야마 오쿄의 문하생・마루야마 오쥬와 아키타 출신의 일본화가 와시야 치쿠호 작품의 족자
마루야마 오쿄의 문하생・마루야마 오쥬와 아키타 출신의 일본화가 와시야 치쿠호 작품의 족자